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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올립니다 공민왕의 반원개혁정치
[한국사] 공민왕의 반원개혁정치 - 미리보기를 참고 바랍니다.
공민왕의 반원 개혁정치
I. 서론
공민왕대의 정치를 이해하기 위해 고려말의 정치적 상황을 간략히 살펴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공민왕의 즉위할 당시의 국제적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원나라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새로이 명나라가 세워지고 있었다. 또한 왜구의 고려 침입은 내적으로도 몹시 혼란을 가져왔다. 또 무신시대에 붕괴되었던 고려의 전통적인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은 원의 지배에 의해 근본적으로 새롭게 재편되었는데, 고려후기의 정치를 좌우했던 친원적 정치세력은 이른바 `권문세족`이라고 불린다. 결국 고려후기의 정치체제는 대외적으로는 반식민지국(부마국체제)이었으며, 대내적으로는 귀족연합정권의 성격을 지닌다.
Ⅱ. 본론
공민왕은 두 차례에 걸친 왕위계승 경쟁 끝에 1351년 즉위하였다. 혹독한 경쟁과 좌절, 10여 년간에 걸친 원 궁정에서의 볼모 생활로 인해, 공민왕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에 고도로 민감한 인물이 된 듯하다. 즉위 당시 그는 겨우 22세였으나 청년다운 개혁의지 뿐만 아니라 매우 노련한 권력감각을 보여주었다.
먼저 공민왕은 원?명의 교체기를 이용하여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였다. 기철을 비롯한 친원 세력을 숙청하고, 원이 설치하였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쌍성 총관부를 무력으로 철폐하고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는 한편 그 탄력으로 인당엑 요동을 공략하도록 명하는 등 영토 회복을 결행했다. 또 공민왕은 원의 간섭으로 바뀌었던 관제를 복구하는 한편, 몽고풍을 없애는 등 반원 자주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공민왕은 대외적으로는 반원 자주 정책을 쓰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개혁을 추진하여 권문 세족을 억압하려고 하였다. 먼저, 무신정권 이후 인사권을 장악하여 왕권을 견제하고 신진 사대부의 등장을 억제하고 있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권문 세족과 인연이 없는 신돈을 기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의 판사로 삼아 권문 세족들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소유주에게 넘겨주거나 양민으로 해방시키는 개혁을 단행했다. 광종의 노비 안검법에서 알 수 있듯이, 전민변정도감의 개혁이 성공한다면 권문 세족의 세력을 약화시켜 문벌 귀족 이래의 지배층의 모순을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그러나 결굴 신돈이 제거되었고 공민왕마저 시해되어 개혁은 실패하고 말았다.
Ⅲ. 결론
지금까지 고려말의 정치적 상황과 그 속에서 공민왕이 취했던 반원 개혁 정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여기에서는 공민왕이 시도했던 개혁이 실패했던 원인을 알아보고자 한다.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실패한 원인으로 우선 나라 안과 밖의 문제를 들 수 있다. 당시의 상황은 나라 밖에서는 원의 압력과 홍건적, 왜구의 침입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며 나라안에서는 개혁정치에 대한 문벌 귀족 즉 권문 세족의 엄청난 반발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둘째, 공민왕을 도와주는 일관된 정치세력이 없었다는 점도 실패원인중 하나이다. 예를 들자면 이제현과 신진세력이 있었다곤 하나 공민왕은 왕권강화의 목적으로 개혁을 실행하고 이제현은 관료위주의 정치목적이 있었다. 이렇게 둘의 정치노선이 달랐다는 것도 실패원인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초기 공민왕이 보여주었던 과단성과 총명함, 정치에 대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공민왕의 정치 균형감의 결여원인은 자신의 부인인 노국공주의 죽음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개인적 불운으로 정치개혁에 대한 의지가 하락하게 됨으로서 공민왕의 반원개혁정치는 실패하게 된다.
자료출처 : http://www.ALLReport.co.kr/search/Detail.asp?pk=10973414&sid=sanghyun7776&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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