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9일 일요일
이탈리아에 서의 공산당의 역사와 지위 다운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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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 서의 공산당의 역사와 지위
이탈리아에 서의 공산당의 역사와 지위
이탈리아에서의 공산당의 역사와 지위
1. 들어가며
이탈리아공산당(PCI)은 의회주의, 다원주의 정당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정당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87년 선거에서 26%의 지지율을 유지할 정도로 아직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 전후 재건기와 냉전기의 이탈리아공산당
이탈리아 공산당 역시 초기 의회주의 정당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프랑스공산당과 같은 경로를 걷게 된다. 즉 코민테른 7차 대회의 결의에 입각하여 정당 상층간의 협상에 치중하는 의회주의 정당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공산당은 이탈리아상황 속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적인 모습을 띠게된다.
1) 전후 재건기 동안 대중조직, 대중운동과의 결합력 대신 기독교민주당 등과의 연합에 치중한다.
2) 전후 대중의 반교회 운동과 무관하게 바티칸과 화해를 도모하는 정책을 추진한다. 이탈리아의 상황은 교회의 영향력이 엄청나게 크며, 대중과 교회를 분리시켜내는 것은 커다란 과제로 제기되었었다. 전후 이탈리아의 상황은 교회의 전쟁시 파시즘과 결탁에 대한 대중적 공분이 존재하고 있었고, 교회와 대중의 분리를 이루어 낼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창출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산당은 기독교민주당과의 연합을 위하여 그당시 발발하던 대중들의 반교회투쟁과 무관하게 바티칸과 화해를 도모하게된 것이다.
3) 대중에게 재건과 생산성투쟁에 치중하도록 하는 정책을 제기하며, 결국 대중들의 혁명적 잠재력을 억누르게된다.
프랑스공산당의 경우와 같이 이탈리아 공산당은 당활동의 중심을 일반민주주의로 놓았고, 재건기동안 삼당체제(기독교 민주당, 사회당, 공산당)의 일원으로 참가했으나, 결국 대중적 기반의 부재로 무기력해지는 과정을 격게된다.
이상과 같이 활동방식, 노선상에 있어서 이탈리아 공산당은 프랑스 공산당과 거의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 공산당이 프랑스 공산당과 차별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치노선의 변화에 조응하는 당구조의 변화를 추진한다는 점이다. 즉 의회주의에 맞는 새로운 정당구조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톨리아티는 1944년10월 연설에서 합, 비합시절에 겪지 못한 새로운 문제에 이탈리아 공산당이직면하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전위당에 대한 대안으로 의회주의적 대중정당의 건설을 제기하게 된다. 톨리아티는 의회주의적 정부 참여노선하에 요구되는 새로운 당은 비판적이기 보다 건설적 자세를 견지함과 아울러 전국민적인 대중정당이 될것을 강조했다.
톨리아티의 전국민적인 대중정당이라는 개념에는 톨리아티의 당의 계급성에 대한 편향된 이해를 반영하고 있는데 톨리아티는 당의 계급성을 당의 사회적 구성이나 지지층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전국민적 대중정당으로 전화한 후 이탈리아 공산당은 당원이 급속하게 증가하는 시기를 겪게 된다. 43년에 5~6000명 수준이었던 당원수가 45년까지 170만명 수준으로 커졌으며 54년에는 250만으로 절정에 이르게 된다. 당의 주요관심이 대중의 계급의식적 통일이라는 점보다는 득표율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이러한 방침은 효과를 보게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당원의 급격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는 당운영에서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 즉 당지도부와 당원의 분리현상이 그것이었다. 당은 활동가 집단으로서 대중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나아가 그것과 상층지도부는 긴밀한 연계를 맺어야 한다. 그러나 공산당은 당이전 인민을 대표한다는 점을 당의 다계급적 구성강화에 무매개적으로 직결시켰다. 그것의 귀결은 당원과 일반대중의 차별이 모호하고 당내 실질적 활동가들이 축소되며 나아가 상임위원의 관료화를 촉진시키는 것이 된 것이다. 당원의 대중화와 활동가의 축소는 당원의 당노선에 대한 이해를 협소화시켰으며 결국 당의 방침에 무조건 복종하는 현상을 낳게 되면서 또다른 형태의 관료주의를 양산하게 된 것이다.
전후시기 이탈리아 공산당은 대중조직과의 관계에서 프랑스와 같이 철저한 종속관계를 유지하였다. 이탈리아에서 노동자계급은 조직은 파시즘체제 속에서 거의 파괴되었다. 전후 이탈리아의 노조건설은 대중의 자생적 힘에 기반했다기보다는 정당의 도움으로 수립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초기부터 정치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중조직은 정당의 방침에 입각하여 자신의 활동을 수행하는 집행부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반영하는 것은 전후 재건기와 냉전기동안 이탈리아에서는 일반민주주의 노선과 의회주의 정당의 조직관을 채택했으나 아직 상당부분 스탈린적 잔재가 남아있다는 것이며, 유로꼼의 시기로 접어들면서 이탈리아는 완전한 독자적인 모색을 하게된다.
3. 유로꼼시기의 이탈리아공산당
유로꼼시기 이탈리아 공산당이 다른 유로꼼의 공산당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당구조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4년 새로운 당을 주창한 이래 당과 당원의 괴리현상의 지적, 관료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는 당내에서 좌우파간의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당시 당내 우파나 좌파나 모두 스탈린주의에 대항한 개혁을 주장하게 된다.
우파는 스탈린의 형식적 일원주의를 비판하면서 다원주의원리도입을 기반으로 권력남용을 방지할 법적 제도적 장치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좌파는 제도적 보장보다는 이탈리아 공산당 내에서의 광범위한 대중의 참여를 중시했다. 좌파의 대표적 이론가였던 잉그라오는 당의 전략과 일상적 활동의 괴리라는 당내분리현상에 대해 주목한다. 그러면서 정치노선 수립과정에서 당의 하부토대가 거의 참여를 하지 못함에 따라 지도노선에 대한 대중의 불철저한 이해로 귀결되고, 이것은 당활동가에게 엄청난 과부하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평가를 통하여 잉그라오는 당의 전문화와 더불어 무엇보다 당의 통일을 주장한다.
이러한 논쟁의 과정에서 당지도부는 우파의 입론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즉 제도적인 다원주의로 당의 관료화를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당노선에 대한 당원의 이해를 높이기위한 교육활동의 강조와 함께 보다 주되게는 당의 탈집중화를 제의하게 된다. 그리고 이와함께 당 지도부는 의회주의 정당구조로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전통적인 혁명당의 기본구조인 세포
자료출처 : http://www.ALLReport.co.kr/search/Detail.asp?pk=11047374&sid=sanghyun7776&key=
[문서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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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종류 : HWP 파일
자료제목 : 이탈리아에 서의 공산당의 역사와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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